2012년 10월 13일 토요일

미국) 바이블 벨트의 보수주의자가 일 년 동안 게이로 가장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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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3

복음주의파 리버티 대학교 졸업생 티모시 큐렉은 직접 게이의 삶을 살아본 후 더욱 확고한 신앙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내슈빌 게이 프라이드에 처음 참가한 'The Cross in the Closet'의 저자 티모시 큐렉(중간)과 친구들


티모시 큐렉은 동성애를 혐오하면서 컸다. 미국 바이블 벨트 깊숙한 곳에서 보수적인 기독교인으로 자라는 그는 게이가 된다는 것은 즉 하나님을 저버리는 행위라고 배웠다. 우익 교회에 다닌 그는 자신을 예수님의 병사로 여기며 복음주의교파의 사관학교나 다름없는 리버티 대학교로 진학했다.   
그러던 어느날 티모시는 노래방에서 한 기독교인 친구가 레즈비언임을 밝힌 일로 집에서 쫓겨난 이야기를 자신에게 털어놓은 것을 계기로 자신의 신앙심과 자신이 교회에서 배운 바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26 살의 청년 티모시는 놀랍게도 동성애자를 가장하고 미국에서 직접 게이의 삶을 살아보기로 결심한다. 
티모시는 일 년 동안 고향 내슈빌에서 '잠복' 동성애자로 살았다. 교회 사람들과 친구는 물론 가족들에게도 게이라고 밝혔다. 티모시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친구 두 명과 숙모 한 분(티모시가 게이라는 사실을 어머니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염탐했다) 밖에 없었다. 그 중 숀이라는 친구가 티모시의 남자친구 역을 맡았다(티모시는 숀을 "금은 뚝쇠 테디베어"라고 불렀다). 티모시는 게이 카페에 일자리를 얻게 됐고 게이바에서 어울리며 게이 소프트볼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성애자 기독교인이라는 내면의 정체성을 잊지 않았다. 
그 결과가 바로 이 놀라운 'The Cross in the Closet(클로지트 속의 십자가)'라는 책이다. 이 책은 1960 년대 남동부지역에서 흑인 행세를 했던 한 백인의 저서 "Black Like Me(나처럼 흑인)"과 2006 년 남자로 가장하고 지낸 경험을 기록한 노라 빈센트의 저서 "Self-Made Man(자수성가한 남자)"의 맥락을 잇는다. 그는 Oberver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 사람들의 입장이 되기 위해서는 게이로서의 삶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가족, 친구들 그리고 온세상에 게이라고 커밍아웃해야 했죠."라고 말했다.
게이로 지낸 일 년을 기록한 티모시의 글은 감정적이고 진솔하며 가끔은 배꼽을 잡게도 한다. 그의 이야기는 예의바르지만 한편으로는 의구심을 품은 보수주의자에서 시작해 자신의 신앙을 확고히 다지면서도 동성애자의 평등권 운동도 포용하게 되는 데서 끝을 맺는다. 
티모시는 게이로 지내는 동안 많은 친구들, 특히 리버티 대학교의 교우들과 멀어져야 했다. 그 친구들은 티모시가 커밍아웃을 하자 언젠가는 자신의 죄를 후회하게 될 것이며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티모시는 이 친구들을 잃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 대신 수많은 게이 친구들이 생긴걸요."
하지만 그것은 결코 평탄한 여정이 아니었다. 티모시는 먼저 게이 클럽에 드나들면서 내슈빌의 게이 문화에 적응하기로 결심했다. 클럽에 들어서자마자 베이비 오일과 반짝이로 칠갑한 반라의 근육남이 티모시를 댄스플로어로 끌고갔다. 두 사람이 비온세의 음악에 맞춰 춤출 때 그 남자는 마치 말을 타듯 티모시 위에 올라타 티모시를 "야생마"라고 불렀다. 한 순간에 너무 깊이 들어와버린 티모시는 "토하고 싶었고, 담배도 피고 싶었고, 그 녀석을 실컷 패 주고 싶었다"고 적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상황은 조금씩 나아졌다. 티모시는 남자들과의 섹스를 피하기 위해 숀에게 정조있는 남자친구 역할을 시켰고, 그러면서 순식간에 내슈빌의 게이문화의 일부분이 되어갔다. 그는 게이 문화를 탐험하면서 게이 문화도 미국의 여느 삶의 단면과 마찬가지로 다채롭고 흥미롭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 번은 게이바에서 게이 기독교신자들이 모여 천지창조설에 대한 믿음을 놓고 토론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도 있다. 티모시는 "게이 기독교 신자들이 저보다 더 독실한 거 같아요."라고 말한다. 그는 동성애자 인권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결국 뉴욕에 있는 주미 바티칸대사관 앞에서 시위에 참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실험에는 댓가가 따르는 법이다. 티모시는 어머니가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알아보기 위해 어머니의 비밀일기장을 훔쳐봤다. 일기에는 "동성애자 아들을 두느니 의사로부터 말기암 선고를 받는 게 더 낳을 것 같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티모시의 여정은 곧 어머니 자신의 여정이 되었고, 어머니도 결국 마음을 바꾸게 된다. 티모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주 보수적인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가 게이 공동체의 지지자가 되셨어요. 너무 뿌듯합니다." 
티모시는 모욕적인 소리를 직접 듣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언젠가 리버티 대학에서 시위하는 동성애자들에게 ' fags(호모새끼들)'라고 한 적이 있던 티모시였지만, 이번에는 정반대의 위치에서 욕을 듣게 되었다. 내슈빌에서 소프트볼 연습시합을 할 때 개를 산책시키던 한 남성이 티모시와 그의 동료들에게 "faggots(호모새끼들)"이라고 한 것이다.
그 남자에게 맞설 수 없었던 티모시는 충격에 싸여 눈물을 흘렸다. 그는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 그냥 정신이 갔어요. 눈 앞에 시뻘개지던데요. 그 한 마디가 너무나도 폭력적이었어요."라고 말한다.
어느덧 티모시의 여정에도 끝이 왔고, 그는 다시 한 번 '커밍아웃'을 하게 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성애자 기독교인으로 커밍아웃했다. 하지만 티모시는 자신의 여정 중에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바로 자신의 신앙심을 확고히 다지게 됐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게이로 보낸 1 년이 저의 신앙심을 구한 셈이죠."
티모시는 다른 보수주의 기독교인들도 자신의 경험을 통해 동성애자 또한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점, 그들 또한 독실한 신앙심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동성애자들에게 복음주의교파의 또다른 면모를 보여 줄 수도 있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보수성향 기독교인들은 편협하지 않아요. 큰 목소리를 내는 소수의 무리가 이목을 끌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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