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y marriage 'Nazis' and the disgrace of Lord Carey)
결혼평등을 주제로 한 토론회에서 캐리 경은 자신이 종교적 박해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나치 독일 시절의 유태인들을 기억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 시절 동성애자들이 겪은 고통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경고: 이 기사는 성폭력과 고문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닉 클레그 부총리를 비롯한 동성결혼 지지자들로부터 편협한 자라는 소리를 들은 전(前)캔터버리대주교 캐리 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치 독일 시절의 유태인들을 잊지 마십시오. 유태인을 욕한 자들이 결국 유태인들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를. 그것은 바로 전체주의 국가를 향한 첫걸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저항해야 합니다. 민주주의를 보존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유산을 간직하며 공평한 논의를 거쳐야 할 것입니다."
나는 나치 독일 시절의 동성애자들도 기억하고 싶다. 게슈타포는 엄청난 양의 동성애자 명단을 작성하였고, '라이히 동성애-낙태 방지 중앙국'은 아리아인의 고국과 정체성에 위협을 가하는 이들을 처단했다. 많은 이들이 성교정을 강요당했고 수백 명이 거세의 위협을 받았다. 만오천 명이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혹사당했다. 이들은 강제수용소에서도 분홍색 삼각형 등의 배지를 달아 다른 재소자들과 구분되었고, 한층 더 잔혹한 대우를 받았다. 사격연습에 동원되는 이들도 있었고 생체실험에 동원되는 이들도 있었다. 특히, 의사 칼 페르네트는 재소자들의 성을 교정시키고자 수술을 통해 인공분비샘을 인식하기도 했다.
고(故) 피에르 셀 씨는 다큐멘타리 '형법175조'에서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당시 17 살이었던 셀 씨는 동네 경찰에게 체포당하자마자 나무몽둥이로 고문과 강간을 당했다. "우리가 저항하자 나치 친위대들은 화를 냈고, 친위대들은 몇몇 재소자들의 손톱을 뽑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자 위에 무릎 꿇고 앉아 있었는데 친위대들은 그 자를 부러뜨려서 우리를 강간했습니다. 창자는 구멍이 났고 피가 사방으로 튀었어요. 아직 그 때의 비명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선합니다." 그러나 그 뒤에 일어난 일은 더 참혹했다.
셀 씨가 쉬르멕 수용소에서 강제노동을 한지 6개월 째 되던 어느날 "확성기에서 점호를 하라는 명령이 나왔습니다. 간수들은 늦는 사람이 없도록 우리를 발로 차고 소리를 질렀어요. 친위대에 둘러쌓여 방진을 치고 차렷 자세로 서자, 사령관이 참모들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처형을 지켜봐야 했다. 희생양은 다름 아닌 셀 씨가 '사랑하는 친구'였던 18 살의 소년 조였다. "저는 공포감으로 완전히 얼어버렸습니다. 저는 조가 검거 명단에서 벗어나 치욕을 당하지 않기를 빌었어요. 그런데 그런 조가 바로 제 눈 앞에 있는 겁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 눈엔 눈물이 가득 고였습니다." 확성기를 통해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오자, 친위대는 조의 옷을 벗기고 머리에 양동이를 씌웠다. 그런 후 친위대는 사나운 독일 셰퍼드를 풀었다. 충격에 휩싸였던 셀 씨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방범견들이 조의 사타구니와 허벅지를 물어뜯고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를 뜯어먹었습니다. 정신이 아련해져 조의 비명소리는 한 층 더 크게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유럽에서는 동성애가 금지되었고 동성애혐오증이 만연했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이 홀로코스트에서 겪었던 일을 이야기할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각국 정부가 이들 동성애자에게 가해진 끔찍한 일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40 년의 세월이 지난 후이다. 셀 씨는 1980년대 초 스트라스부르주교가 "역겨운 동성애자들"에 대해 험한 말을 끌어부은 것을 계기로 입을 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한 후에도 구타와 살인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고작 닉 클레그 부총리로부터 '편협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자신을 감히 피에르 셀 씨와 나치 정권 때 도살당한 수천 명의 다른 동성애자들에 비유하는 캐리 경의 수치와 몰상식, 그리고 이기심과 비열함을 뭐라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런데 캐리 경의 멍청한 발언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캐리 경은 "동성간의 결합은 결코 이성간의 결합과 같을 수 없으며, 동일선상에 두고 볼 수 없습니다."라고 호소했다. 자신의 애인이 개에게 찢겨 죽는 모습을 봐야했던 실 씨에게 그 말을 과연 할 수 있을까? 셀 씨는 1995 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한밤중에 울부짖다가 깨곤 해요. 50 년이 지났지만 그 광경은 아직도 제 뇌리를 스치고 또 스쳐지나갑니다."
뭐니뭐니해도 캐리 경의 가장 성가신 발언은 언젠가도 들은 적이 있는, 등골이 오싹한 그의 반문이 아닐까 한다. "우리 조국의 문화와 정체성이 약탈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캐리 경의 이 반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여긴 당신네들 조국이 아닌 우리들의 조국이다. 그리고 동성애자들 또한 여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우리 정체성의 일부이다. 편협한 자들이 이 점을 부정하고 특정인의 감정이 다른 사람들의 감정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하게 되는 그 날 우리는 그 어둡고 위험한 길을 다시 걷게 될 것이다.
나치정권의 성적소수자 박해를 다룬 다큐멘타리 '형법175조(Paragraph 175)'는 유튜브에서 전편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f8Ohy15dJsQ
답글삭제